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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던 밤

​마토 | 코하

​실 |코하이코

 복슬거리는 적갈색 머리카락이 책상 위를 차지했다. 한참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쉰 아유미가 곧 결심한듯 흡,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쨩! 일어나, 체육 시간이야. 또 빠지면 아유미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으응.”

“투정부리지 말고. 얼른.”

 

하이바라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키고 아유미의 손길을 따라 일어섰다.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이미 아이들이 체육관으로 떠난지 오래인 뜻이었다. 그리고 하이바라에겐, 체육관으로 가야된다며 깨워줄 친구는 요시다 아유미로 유일했다.

열어둔 창문에서 찬바람이 불어 싸늘했다. 오늘로 벌써 7년이었던가…. 셰리와 미야노 시호가 죽고 하이바라 아이가 살아남은지. 그 사이에 어린 아이다운 작고 여린 몸이 어느덧 굴곡이 지고 키가 컸다. 하이바라는 그 꼴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아이쨩은 크리스마스에 뭐할거야?”

“아, 벌써 그렇게 됐구나.”

“뭐야 그 반응. 설마 몰랐던거야?”

 

아유미가 경악을 담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이바라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하이바라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길뿐이었다. 하이바라에겐 오늘이 혹은 어제가, 어쩌면 내일이 크리스마스인지 아닌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이바라 아이가 된 후, 그녀의 가치는 늘 단 하나였다.

아유미가 또다시 조잘거리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언젠가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일상이었다.

 

 

 

 

체육관에 도착하자 하이바라와 아유미에게로 따가운 눈초리가 내리꽂혔다. 체육관으로 가는 사이 이미 종이 친지 오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뭐 때문에 늦었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이쨩이 전시간에 아파서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깨우느라 늦었어요.”

“아유미, 저번에도 그랬잖냐. 이러는게 한 두번도 아니고… 더 봐주는 것도 남들한테 피해주는 일이야.”

“죄송합니다…”

 

아유미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체육 선생님께 사과했다. 하이바라는 그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쨩도 사과해야지 얼른.”

 

아유미의 채근에 그저 마지못해 하이바라도 고개를 까딱였다. 체육 선생님은 그게 성에 차지 않았으나 특별히 뭐라고 할 순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눈초리로 하이바라를 위아래로 훑을뿐. 아무리 태도가 불량해도 하이바라 아이는 전교 1등의 천재였다. 그건 명실상부한 사실이었다.

 

“그래. 그럼 다음부턴 늦지말고 꼬박꼬박 잘 와. 자, 마저 설명할테니까 줄에 맞춰 서.”

 

체육 선생님의 지루한 설명이 이어졌고 그 이야기를 들을리가 없는 하이바라의 시선은 사선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젠 자신보다 조금 더 큰 키, 반듯한 이마, 검은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검은 가쿠란과 안경, 그린듯한 미소의 청소년기의 남성. 에도가와 코난이었다. 코난이 다정하게 웃으며 반 아이들과 조용히 소근거렸다. 하이바라는 그 모습을 흘긋이다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빨리 체육 시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럼 피구 경기할테니까, 짝수는 저기, 홀수는 여기 서도록.”

“앗싸! 코난 너 우리쪽이야!”

“그래?”

“아유미도 이쪽!”

 

짝수 쪽 팀들이 방실거리며 코난과 아유미를 맞이했다. 옛날부터 운동은 물론이요, 키드 킬러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것이 무색하지 않게 머리도 탁월한 다재다능하고도 다정한 코난이었다. 그런 그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아유미 또한 상냥하고 종종 보이는 용감한 모습에 반 아이들의 인기를 샀다.

 

그에 반해 홀수 쪽 팀들은 아주 죽상이었다. 하이바라가 홀수쪽 라인 안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딱 봐도 성실하게 경기에 임할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겉모습 덕에 학기 초에는 다른 학년 선배들까지 반에 찾아오게 만든 사람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런 사람들은 다 걸러지기 마련이었다. 계속해서 반을 겉도는 그녀에겐 은근한 조롱과 괴롭힘이 주위를 맴돌았다. 물론 남몰래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도 한 트럭이었으나 감히 고백할 생각조차 못했다. 고백했다가 어떻게 차이는지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러지 못했다. 안그래도 자존심이 강할 시기에 그런 모욕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자자, 다들 모였지? 그럼 경기 시작한다!”

 

왁자지걸 아이들이 비명과 비슷한 괴성을 지르며 경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이바라 또한 느긋한 걸음으로 요리조리 공을 피해다녔다. 아무리 성의 없다고 해도 매일 생사를 넘어가는 삶을 살았던 여자였다. 고작 중학생이 던지는 공에 쉽게 맞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이바라는 그저 적당할 때를 기다리고 그때 맞고 빠질 생각을 했다.

 

“코난군 화이팅!”

 

아유미가 공을 주은 코난에게 가벼운 응원을 보냈다. 코난 또한 짧게 웃어주곤 공을 던졌다. 그 나름대로 어느정도 힘 조절을 한게 하이바라 눈에는 보였다. 코난이 던진 공에 운동신경이 그렇게 좋지 않은 여학생 한 명이 탈락했다. 그러자 곧 바로 홀수 팀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남학생이 공을 줍고 짝수 팀을 향해 던졌다.

 

“아! 미안해!”

 

이번엔 짝수 팀에서 공을 잡으려다 미끄러뜨린 남학생이 탈락했다. 그는 곧바로 사과하며 경기장을 나갔고 떨어진 공을 덩치 큰 남학생이 잡았다. 그는 하이바라도 농구부라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농구부의 그가 힘껏 던진 공이 하이바라를 향해 날아왔다.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지금 탈락하면 별로 좋지 않은 말이나 들을걸 알았다. 그저 이번에도 비껴서 피할 셈이었다.

 

“아.”

 

누군가 하이바라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하이바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퍽! 통, 통통….

 

싸한 적막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체육 선생님도 당황한 모습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하이바라의 시야가 쫒는 사람은 코난이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하, 짧은 단말마와 닮은 냉소를 내뱉었다. 당황한 코난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감히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사람이지만… 약자에겐 너무 나약했다.

 

하이바라의 왼쪽 뺨이 새빨갰다. 코에서는 핏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하이바라는 무심하게 소매로 흐르는 피를 비볐다.

농구부의 남학생이 어쩔줄 몰라하며 하이바라에게 다가왔다. 다른 학생들은 저들끼리 퍽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종 조롱 섞인 웃음소리도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아…. 그 미안. 그렇게 맞을 줄 몰라서…”

“…됐어.”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에게 굳이 사과를 받을 정도로 고의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 기회에 보건실에나 누워 있을 생각이 만만이었다. 아니지, 그것보다 자신의 팔을 잡은 같은 팀의 학생을 찾는 쪽이 맞을 것이다. 고의성으로 따지면 그쪽이 더 죄질이 나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보다 죄질이 나쁜가? …비교 대상도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질투심에서 시작했을 질나쁜 장난과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독약을 만드는 것 따위가 같은 무게일리가 없었다. 하이바라는 이미 이 나이 때에 사람을 죽였다. 살인범이 되었다. 그러니 이것은 마땅히 맞아줄 만한 일이었다. 그 죄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선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 약의 피해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살아가라고 했으니까…. 하이바라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가 준 다정한 유예로부터 왔다.

 

하이바라가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코난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피를 닦아대는 하이바라를 잡아끌었다. 안경에 빛이 서려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으나 입술은 딱딱하게 내린 채였다.

 

“얘, 다쳤잖아요.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와도 괜찮을까요?”

“어어, 그래. 갔다와라.”

 

코난이 형식적으로 체육 교사에게 묻곤 가볍게 목례하며 체육관에서 나갔다. 이건 당연한거야. 난 반장이잖아, 반 애를 돕는 것은 그냥 의무야…. 코난이 자신을 세뇌하듯 그 말들을 반복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을 수 있는건 그 옆에 붙어있는 하이바라 정도였다.

하이바라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수치심에 눈가가 뜨거웠다.

 

“나 혼자 가도 돼.”

“좋은 말로 할때 그냥 따라 오지?”

 

코난의 말에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전이라면 따박따박 몰아붙였을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이바라는 더이상 말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그의 짜증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았다.

코난에게는 이제 하이바라는 그 무엇도 아닌데, 하이바라에겐 여전히 코난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의미라는 그 사실이 오늘따라 더 욱씬거렸다. 해독제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하이바라는 더 이상 코난과 동등한 입장이 되어줄 수 없었다. 코난의 구원은 그것을 매개체로 하지 않았으나 코난의 다정은 그것을 매개체로 했다. 하이바라 아이는 쿠도 신이치의 삶을 망친 범죄자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그에게 또 폐를 끼쳤다. 그가 또 자신의 삶에 관여하게 만들었다. 살인자의 죄값을 그가 함께 치룰 의무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터진 입안에서 피맛이 돌았다. 농구부라고 하더니 확실히 공이 아팠다. 하이바라는 그 공을 차라리 자기가 맞아서 낫다고 생각했다. 이미 육체적 고통엔 무뎌진지 오래였으니까. 이제 하이바라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코난의 날선 말 따위 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맞아서 아픈것보다 오랜만에 코난의 걱정을 받아 가슴께가 울렁거린게 더 크게 느껴졌다는 까닭도 있었다. 그의 다정한 눈길 한 번 받아보지 못한지 벌써 꽤나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거대한 감정의 크기에 하이바라는 절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에게서 받는 동정의 대가가 지독했다.

 

잡다한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보건실이었다. 코난이 하이바라를 잡지 않은 왼손으로 보건실 문을 열려고 하자 하이바라가 대신 손을 뻗어 문을 열고 이젠 익숙해진 멘트를 내뱉었다.

 

“하이바라 아이에요. 선생님이 보건실에서 좀 쉬다오라고 해서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보건실이 텅 비어있는 탓이었다. 하이바라가 튀어나오려던 한숨을 삼키고 코난의 표정을 흘긋이며 살폈다. 찡그린 채였으나, 책임감은 사라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툭, 코난이 하이바라의 손을 놓았다.

 

“저기 앉아 있어. 응급처치 정도는 할 줄 아니까.”

“그냥 내가 할게. 나 신경써줄 시간에 반에 빨리 가봐야하지 않겠어? 반장이고 곧 수업도 시작하잖아. 뭣보다 응급처치도 당신보다 내가 더 잘하는거 알잖아.”

“네가 네 몸을 챙길줄 안다고?”

 

하. 코난이 하이바라를 향한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봐온 하이바라는 자신을 돌볼줄 몰랐다. 그 좋은 머리는 자기자신에 관한 일에 관해서만 될 때면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듯 어리석은 여자가 되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도망가기 바빴다. 책임을 회피하고 제 목숨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목숨의 무게는 그 누구도 다를 수 없는데. 어떠한 흉악범이더라도, 수많은 생명을 살린 성인이더라도, 평범한 사람이더라도, 그 누구더라도 생명은 고귀했다. 그런 생명을 제 손으로 가볍게 포기하는 여자였다.

 

코난의 말 뜻을 알아차렸는지 하이바라의 원래도 새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창백하다는 말이 더 어울려졌다. 잠시 굳어 있던 하이바라가 묵묵히 의자를 끌고 앉았다.

 

코난이 핀셋을 꺼내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하이바라의 코밑과 왼뺨을 닦아냈다. 슥슥 솜으로 굳은 피를 닦아내는 소리와 알코올 향이 둘 사이를 뒤덮였다.

 

“…걔 어떻게 할거야?”

“걔라니, 누구?”

“네 팔 잡은 녀석. 원한다면 증언해줄 수도 있어. 나도 봤으니까.”

 

그래, 당신이 못봤을리가 없지. 탐정의 눈을 갖고 있는 당신이. 하이바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잡으려고 한다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천성이 탐정이었으니까. 아무리 탐정에 대한 열정을 가두고 사건에 달려들려고 하지 않아도 어떻게 천성을 거부할 수 있을까. 에도가와 코난이, 아니 쿠도 신이치가 탐정인 것은 셰리가 조직의 과학자였던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는데.

 

“글쎄. 그럴 필요까진 없을거 같은데. 일 크게 만드는 것도 귀찮고. 그냥 어린애의 장난 정도니까.”

“…아, 그러셔.”

 

코난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얼핏 무언가를 참는 것 같기도 했다. 떨리는 핀셋이 그걸 증명했다. 하지만 더이상 그에게서 뭘 캐낼 수 있을 정도로 하이바라는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서 다정한 위로의 답 따위 기대하지 않았기에 또 다시 적막이 계속되었다.

그 적막이 계속될 동안, 하이바라는 최대한 빨리 그의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자신이 차라리 이 보건실에 둥둥 떠있는 먼지가 되길 기도했다.

 

 

 

 

콜록, 콜록. 기침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하이바라가 어제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 연구실에 박혀있던 뒤로, 한참을 나오지 않아 박사님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하이바라는 식음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걸 보고 경악을 한 박사님이 침대에 눕혀준 뒤에도 밤새 열을 앓다가 이제야 어느정도 열이 가라앉은 참이었다. 박사님의 눈썹이 팔자 모양이 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군….”

 

하이바라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이젠 박사님의 가슴께 언저리에 닿을 정도로 자랐지만 여전히 박사님에겐 비가 베이카 거리를 잠기게 할 것마냥 세차게 내리던 밤, 흙탕물로 더럽혀진 성인용 가운을 입은 작은 아이로만 보였다.

아가사에겐 자식은 없었지만, 하이바라를 보면 마치 자식을 보는듯 해서 더 마음이 쓰였다. 하이바라는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타인과 관계를 쌓으며 살아온 적이 없어서 늘 경계하고 벽을 세우기 바쁜 아이였다. 이 아이에게 삶의 의지를 주는 것은 하나뿐인 제 언니의 평범한 삶의 지속이었고 그것을 잃은 아이는 살지 않기로 했다.

이 아이에게 제 목숨값은 그렇게나 가냘펐다.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다. 네 주변에 이렇게나 많이 네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사랑을 알아주듯 아이는 점차 밝아지는듯 했다. 남들과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간간이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으며 원하는 것을 말하고 얻지 못하면 시답잖은 투정을 부리기도, 그것을 얻으면 소소하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조직으로부터의 위협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지나칠 정도로 떨거나 예민해졌다. 또 주변 사람들을 철렁하게 만드는 선택 따위를 하기도 하였으나 문제 없었다. 그녀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도왔으니까.

그 덕에 조직은 무사히 괴멸되었고 무서울게 사라진 하이바라는 해독제 연구엔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래…. 모든게 실패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조직에서 회수할 만한 데이터 따위는 없었다. 조직에선 셰리의 배신 이후 APTX4869에 관한 데이터 모든 것을 삭제시킨듯 아무리 애써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는 다들 예상했던 범위였으니 속이 쓰렸으나 견뎠다. 어쨌건 그 약의 개발자인 그녀가 최선을 다했으니까, 해낼 수 있을거란 희망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셰리의 죄를 갚아내려는 하이바라의 노력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동시에 평생 조직에 의해 살아가게 만든 재능을 처음으로 하이바라가 원망하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에도가와 코난에게 있었다. 몇번의 해독제 시험작을 먹은 결과, 결국 내성이 생겨버린 것이다. 물론, 어쩌면 또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해독제가 듣지 않은 원인으로 들 수 있는 것에는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있었다. 하나하나 다 샅샅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처음 코난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지 않았다. 슬퍼했으나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저 하이바라를 다독이며 넌 최선을 다했다며 기꺼이 셰리의 죄를 같이 짊어졌다. 다시 운명을 함께하겠노라고 말했다.

 

코난은 쿠도 신이치의 사망 신고를 할 때까지도. 자기 자신의 장례식에 갈 때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속이 썩어문드러져가는 악취를 맡은 것은, 비단 하이바라뿐만이 아니었다.

 

그 악취가 악취만이 아니게 된 것은 테이탄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그 날은 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옥상 위에서 그들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그날따라 하이바라는 처음 주변인들에게 졸업을 축하 받아, 조금 들떠있었고 그 탓에 코난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빨리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하이바라는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당신. 이거 두고 갔어.”

 

주머니를 잠시 뒤지더니 하이바라가 어떤 것을 코난에게 건넸다. 그 손에는 추적 안경이 놓여있었다. 쿠도 신이치를 에도가와 코난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도구를.

 

안경을 쓰지 않은 탓에 코난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게 쉽게 보였다. 하이바라가 건넨 물건이 안경이란걸 깨달은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팔을 휘둘렀다.

탁! 그대로 안경이 바닥에 툭 떨어짐과 동시에 파열음이 함께했다. 그 소음 탓에 하이바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버린거야.”

“뭐?”

“두고온게 아니라 버린거라고.”

 

코난은 그저 말을 내뱉은 것뿐인데. 가볍게 팔을 휘둘러 하이바라의 손에서 안경을 쳐낸것 뿐이었는데. 마치 코난이 하이바라의 목을 비틀어쥔듯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하이바라가 말을 내뱉었다.

 

“왜…?”

“나한테, 쿠도 신이치한테 남은게 아무것도 없어서. 에도가와 코난에게도 아무것도 남게 하지 않으려고.”

 

한숨을 내뱉듯 짙은 피로감이 묻어나오는 어투였다. 6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져 자주 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은 하이바라가 알던 얼굴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바다를 닮아 늘 호기심을 비추며 새파랗게 빛나던 그의 눈동자는 마치 심해 속에 있는듯 어두웠고 그 밑에는 검은 다크서클이 자리했다. 늘 부드럽게 웃어주었던 입가는 딱딱하게 내려가있었다. 하이바라보자 조금 더 작았던 키는 그보다 커졌고 동그란 얼굴형은 어느새 사춘기의 소년의 얼굴이 되어있었다. 겨울의 건조함이 그에게 옮은듯 했다.

 

“이제 내 옆에 있는건 더이상 란이 아니고. 내가 해결한 사건은 더이상 쿠도 신이치의 이름으로 신문에 실리지 않아. 쿠도 신이치가 이뤘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에도가와 코난이 빼앗아갔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다시 그 안경을 써….”

 

그는 울고 있는걸까? 잘 모르겠다. 표정은 마치 우는 사람 같은데, 눈물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여전히 코난을, 쿠도 신이치를 울릴 수 있는 사람은 모리 란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할 말을 마친 코난이 바닥에 깨져있는 유리 조각을 밟고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하이바라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당신에게서, 모든걸 빼앗아간건 에도가와 코난이 아냐.”

 

완벽했던 쿠도 신이치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것은 조직의 셰리이고 에도가와 코난에게서 그의 다정과 희망을 빼앗아간 것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동화 속의 왕자님과 공주님같은 가엽고도 사랑스러운 연인을 갈라놓은 하이바라 아이이다. 그러니, 그가. 미야노 시호에게 남은 유일한 사람이. 헛된 사람을 미워하지 않길 바랐다.

 

“당신이 원망해야 하는 것은 에도가와 코난이 아니라, 나야. 쿠도군.”

 

 

 

 

하이바라는 삼일을 내리 앓은 후에야 학교에 등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등교한 하이바라를 맞이하는 것은 같은 반인 아유미로 유일했고 하이바라는 그 점에 딱히 유감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길에 스치듯 코난과 마주쳤지만 하이바라만 흘끗일뿐 그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의식적으로인지 하이바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하이바라는 평소처럼 지루한 수업 시간에 멍을 때리거나 이미 훤히 꿰고 있는 코난네 반 수업 중 체육 시간에 일부러 창밖을 내다봐 운동장을 뛰고 있는 그의 모습을 좆았다.

그 후 3교시부터인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점심시간이 되어도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한동안 내리 앓은 탓에 그 후유증으로 식욕이 전혀 돌지 않은 하이바라는 급식실이 아니라 옥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추운 날 밖을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눈은 싫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늘 열여있는 옥상 문은 오늘도 쉽게 열렸다. 숨을 들이키자 시린 공기가 콧속에 들어왔다. 걸음을 옮기자 새하얀 눈이 뽀득거리며 더럽혀졌다. 한참을 그렇게 발을 옮기자 하얀 눈들이 온통 검게 더럽혀졌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하이바라가 옥상 벽 근처를 서성였다. 그리 낮지 않은 벽 덕에 그 위로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위에 걸터앉은 하이바라가 잠시 그 광경을 관찰했다. 운동장에는 벌써 밥을 먹고 나온 아이들을 축구 같은 것을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저들의 친구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을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하이바라 아이를 찾지 않았고 그녀 또한 누구도 찾지 않았다. 라고, 적어도 하이바라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순간, 마치 처음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온 몸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고꾸라질듯 휘청였다. 발밑이 새하얬다.

눈이 쌓인 새하얀 땅. 하이바라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눈밭은 천국이 아닐까. 저 눈이 천국이라, 늘 성경 따위에서 천국은 새하얀 곳이라고 묘사되는 것이 아닐까. 하이바라의 힘이 풀린 몸에 다시 힘이 도는 순간은 없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찾아온 강한 힘이 하이바라를 끌어당겼다.

 

“젠장할! 넌 맨날 나한테 왜 이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약간 울음기가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떨땐 헐떡이는듯 했다. 그게 분노한 탓인지, 다정한 탓인지 하이바라는 알 수 없었다. 하이바라가 단단히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 위에 떨리는 제 손을 올리며 조심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도가와 코난이었다.

 

네가 무슨 권리로 마음대로 죽어. 넌 자신의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해. 그의 눈엔 그렇게 써있는것 같았다.

 

“그러려던게…”

 

아니라. 하이바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코난이 하이바라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도 하이바라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담배 꽁초를 발견했다. 아직도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늘 옥상 문이 열려있던 이유는 그의 탓인듯 했다.

 

“왜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냐고. 차라리 내 눈앞에서 사라지든가! 내 앞에서 사라져서 내가 네 죽음을 말리지 못하게 만들어서, 네가 그렇게 원하는대로…”

 

늘 코난이 진실을 감추는데 도움을 주었던 안경이 그 쓸모를 다한듯 코난의 민낯을 비추었다. 탐정의 재능을 빛내지 못하는 그의 삶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코난을 살게 만드는 것은 쿠도 신이치의 삶이었다. 그것은 모리 란에 대한 사랑이였으며 탐정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쿠도 신이치로 살아갈 수 없음과 동시에 그는 란의 사랑을 잃었고 남은건 탐정으로서의 자부심뿐이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넌 날 살지 못하게 해. 날 죽이는건 늘 너야, 하이바라. 네 앞에만 서면, 날 사람답지 못하게 만들어.”

 

살인자인 과학자가 기어코 저를 사람을 구하는 탐정으로 살지 못하게 했다. 사건을 향하여 달려들려고 하더라도 덩그러니 남은 하이바라가 눈에 밟혔다.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는 여자애가, 신경 쓰였다. 불공정한 취급을 당하더라도 그러려니 넘기는 네 꼴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반 여자애, 딱 그정도로 대하려고 어느때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운명 공동체, 파트너, 가해자와 피해자…. 그 어떠한 거창한 말로도 서로를 가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으로 너에 대한 원망을 달랬다. 그러나 그 결심은 너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거세게 흔들렸다.

그렇다고 전처럼 참견할 수도 없었다. 이제 우리에겐 그럴만한 명분이 없었다. 더이상 우린 운명을 공유하지 않았다. 넌 더이상 에도가와 코난의 삶의 끝을, 쿠도 신이치의 지속될 삶을 책임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이바라 아이의 삶은 미야노 아케미를 구하지 못한 코난을 위한 삶이었다. 그 책임감이 코난의 어깨에 짐을 올렸다. 그래서 쿠도 신이치를 살해한 셰리를 원망했으나, 버리지 못했다. 셰리 또한 미야노 시호였으며 그들이 곧 그의 파트너였던 하이바라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이바라는 제 눈가에 열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심장은 쿵쿵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게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인지, 겁을 먹어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미안, 미안해. 내가, 당신을…. 아, 윽. 흐으….”

 

쿠도 신이치인 에도가와 코난은 끝내 울지 않았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슬프더라도, 분노하더라도, 행복하더라도. 그 둘은 모두 탐정이었으니까. 그러니 하이바라 아이가 울음을 토했다. 이젠 잿더미가 되어버려 울지 못하는 가여운 제 사랑을 대신하여 울었다. 그게 기만인걸 알았다. 위선인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하이바라가 알고 있는 유일한 위로의 방식이었다. 곁을 지키고 상대를 대신하여 감정을 말해주는 것. 그 모든 위로가 하이바라 아이가 사랑하던 에도가와 코난으로부터 배운 것들이었다.

 

날 살리는건 늘 당신이었는데. 당신은 내게 자신을 죽이는건 나라고 말해. 이게 만약 당신이 말한 운명이라면…. 난 어떻게 해야할까. 더 버틸 수가 없는데. 당신의 말 한마디, 눈길 한 번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수가 있을까.

 

그러니 사랑하는 당신께 나의 죄를 고한다.

감히 살인자인 내가, 사람을 구하는 당신을 사랑한 죄를.

 

“미안,해…. 내가, 당신 곁에서 남아있어서 흐윽, 으. 그 애가 아니라. …나여서 미안해.”

 

하이바라가 코난의 옷가지를 붙잡으며 무너졌다. 코난에게는 그 모습이 언젠가, 처음으로 하이바라가 코난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였을때가 비추어보였다. 아랫입술을 억세게 물어뜯어 피가 흘렀다.

사람을 죽이는 약을 만드는 것을 네가 원하지 않았던걸 알았다. 그것은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겠지. 모든게 네 잘못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그 녀석들의 잘못인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널 용서해버리면, 잃어버린 쿠도 신이치의 삶은 어떻게 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 대체제를 찾지 못해서 코난은 하이바라를 용서하지 못했다.

살아갈 이유를 잃은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명분으로 네 죄를 댔다. 네가, 셰리였던 네가 만든 죄에 대한 원망함으로써 살아갔다. 그래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망치는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버리지 못할것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들이 마치 섭리를 거스르고 시간을 거스른 쿠도 신이치와 미야노 시호에게 내려지는 저주와 같았다.

 

코난이 하이바라를 끌어안았다. 눈물 범벅이 되었으나 여전히 잘난 그 얼굴을 제 가슴 속에 파묻혔다. 뜨거운 체온이 코난의 몸을 녹였다. 눈이 내려 땅 위에 소복히 쌓였다.

 

Jingle bells, jingle bells Jingle all the way Oh, what fun it is to ride In a one horse open sleigh….

 

간간이 물기 어린 훌쩍임과 함께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기 시작했다.

잿빛의 사랑

Merry Shihom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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