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밤
마토 | 코하
47 |시호신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독실한 종교인에겐 아기 예수의 탄생일일 것이고, 다정한 연인은 한 해의 끝자락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날일 것이며, 영리한 장사꾼은 예쁘게 포장한 상품을 팔아먹기 좋은 날일 것이다.
그리고 미야노 시호에게 크리스마스는, 빛바랜 추억의 파편 같은 날이었다.
“…….”
창밖을 장식하는 하얀 눈과 멀리서 울리는 캐럴, 곳곳에서 번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호는 생각했다.
차라리 하이바라 아이에게 묻는 것이, 더 크리스마스에 걸맞은 대답이 나오리라고.
어둠이 질척하게 녹아든 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흘린 미야노 시호와 달리, 하이바라 아이는 찬란히 빛나는 사람들 틈에서 짙은 기억을 쌓았으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시호.”
머릿속으로 언니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이맘때면 항상 겪는 일. 어쩌면 자신이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사람을 뒤흔들고 떠난 찰나를 응시하며 시호는 잔을 기울였다. 새까맣고, 뜨겁고, 쓴맛. 속에서 부스러지는 빛바랜 추억과 같은 맛이었다. 지금을 살아갈 힘을 쥐여주지만, 종래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선 자리에 주저앉게 만드는. 그런 맛.
오늘따라 유독 쓰게 느껴지는 커피를 머금으며 시호는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마시는 커피가 쓰게 느껴지다니. 이보다도 우스운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동시에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뻔하지.’
보나마나였다. 그 멍청하고 바보 같은 탐정 놈 때문일 것이다. 까맣고 쓴맛 사이로, 혀끝에서 초콜릿의 단내가 감도는 것은.
시호는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코난일 적에 하도 마셨더니 이제 이게 더 입에 맞는 것 같다며, 잘도 웃던 얼굴. 커피와 같은 색을 가졌지만, 맛도 향도 전혀 다른 것을 머금고 웃던.
그때 그녀가 뭐라고 했더라. 꼭 저 같은 걸 좋아하게 됐다며 웃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아마 그는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귀신 같은 인간이니.
그러니 어제도 대뜸 전화해서 그런 소리를 했던 거겠지.
“미야노. 내일 바빠?”
“나는 늘 바쁜데. 탐정님은 한가하신가 봐?”
“나도 바빠. 약속이 있거든.”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당연히 물어봐야지. 너랑 한 약속인데. 아무튼 바쁘다니 안심했어. 바람 맞을 일은 없겠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약속을 이런 식으로 잡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진짜 바쁜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하긴. 그녀의 일정을 알아보는 일이야,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특히나 크리스마스처럼, 세상이 떠들썩한 날에는 더욱.
‘그런 점에선, 감사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녀가 가만히 앉아 지나간 추억에 잠기는 동시에, 바깥의 모든 사람에게서 괴리감을 느끼고 지독한 고독에 좀 먹혀 잠식되곤 하는 순간들.
이대로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지 말아야지 되뇌면서도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고야 마는 순간들.
그 순간순간마다 그 남자가 있었으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쭉.
‘평소에도 그렇게 굴면 좀 좋을까.’
생각과 달리, 혀끝에서 춤추는 초콜릿 맛과 함께 커피를 머금은 시호가 설핏 웃었다.
언젠가 어떻게 알았냐는 그녀의 말에 그가 한 대답이 떠올랐다. 그냥 전화가 하고 싶어서 한 것뿐이라 말하던 퉁명스러운 목소리.
대답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끝끝내 정말이라며 우겼었다.
그냥, 마침, 우연히. 그런 말로 가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는데도.
그녀를 심해에서 뭍으로 올리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인어 왕자님 같은 말만 골라서 한 주제에.
무심하게 보이려고, 나는 너를 동정하지 않는다고 하기 위해,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고 투박하게 손질까지 했으면서.
‘참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어느새 잔을 비운 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와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날인 만큼, 본의 아니게 늦어질 것도 고려해야 했으니까.
옷장을 열어 옷을 하나씩 꺼내던 시호의 손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부드럽고 도톰한 푸른색 목소리가 손끝에 걸렸다.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푸름을 쓸어내리던 시호가 헛웃음 지었다.
“하…….”
별로 춥지도 않은 때에 목도리를 선물하기에 뭔가 했더니. 처음부터 이때를 노린 모양이지.
목도리를 둘러맨 시호가 거울을 바라봤다. 푸름에 휩싸인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꼭 누군가의 눈동자 같은 색이 조명 아래 시리게 또렷했다.
목을 감싼 푸름을 문지르며 시호가 찡그리듯 웃었다. 뜻대로 해줄까, 말까.
목도리 맨 자신을 발견하고,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웃는 남자를 볼까, 실망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을 볼까. 비틀린 애정으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결정 내렸다.
그래. 이 정도야.
그녀를 살리겠다고 몇 번이고 위험에 뛰어들던 인어 왕자님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시호가 애태우지 않아도 미리 말해둘 걸 그랬다며 안절부절못할 남자가 눈에 선했다. 그렇다면 굳이 있는 목도리를 매지 않을 필요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기왕에 크리스마스지 않은가. 행복한 날을 보내라던 언니의 목소리가 아직 맴돌고 있었다.
낮게 웃는 시호의 뇌리로 남자의 목소리가 스쳤다.
“바람 맞을 일은 없겠네.”
아무래도 그럴 모양이야. 좋으시겠어, 탐정님.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
검푸른 코트 위로, 파란 목도리를 맨 신이치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이라도 전화할까…….’
눈치 빠른 녀석이니 알아채고도 남았겠지만. 과연 뜻대로 따라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이라도 해두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본인 의지로 하고 오는 걸 보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상대가 누군데…….
사박.
뒤엉킨 상념 사이로 익숙한 발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고개 든 신이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 열댓 걸음쯤 거리에서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목에는 그와 같은 파란 목도리를 맨 채였다.
아, 생각해줬구나. 밝게 웃은 신이치가 단숨에 거리를 줄였다. 한 걸음 거리를 사이에 두고 시호와 눈을 맞추며, 그가 기쁘게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야노.”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시호가 길게 숨 뱉는 소리를 냈다. 낮게 웃을 때 내는 특유의 숨소리.
기분 좋은가 봐. 생각하며 덩달아 즐거워진 신이치가 시호의 옆으로 다가서는 그때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신이치.”
눈꼬리를 휘며, 흘리듯 속삭인 시호가 그를 스치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신이치의 푸른 눈이 느긋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좇았다. 전보다 길어진 적갈색 머리칼, 그 아래를 감싼 건 제가 선물한 목도리…….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 아니. 중요하지. 중요한데. ……방금 뭐라고?
“미야, 아니, 시호! 잠깐만, 방금….”
“안 가, 쿠도 군? 나 추운데.”
“가야지! 가. 가는데, 방금 너…….”
이름 부르지 않았었냐고! 외치는 신이치의 마음과 달리 시호는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었다. 그의 번뇌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멀어지는 시호의 모습에 신이치가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잠깐, 야! 같이 가, 미, 시호!”
선명한 푸르름 뒤로, 또 다른 푸름이 길게 늘어졌다. 거리에 자욱한 붉음 가운데 푸른 궤적이 이어지며 하나의 선을 그렸다.
뒤쫓아오는 기척을 느끼며, 시호가 웃었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따라잡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싼다. 하얗게 긴 손가락들이 서로를 찾아 얽혔다.
나의 인어 왕자님. 나의 구원자. 나를 선택한 나의 푸른 세계. 너는 늘, 나를 따라와 주는구나. 그의 손을 쥔 시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아귀에 들어차는 감각에 마주 힘을 주며 신이치가 시호를 바라봤다. 길게 휘어진 푸른 눈동자.
크리스마스. 붉은 축복이 내린 어느 날이었다.
블루 메리 크리스마스